첫 차, 첫 메달, 첫 서명본
세 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있었다. 첫 차, 첫 메달, 첫 서명본. 처음만큼 유일하고 그래서 더 특별한 게 또 있을까.

오랜만에 일상을 남겨본다.
8월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창업 스터디 프로그램 FastFailer를 거의 반년 만에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고,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던 커피챗을 내가 먼저 나서서 네다섯 번이나 진행했다. (커피챗 요청 환영합니다!) 주 2회 다니는 요리학원 때문에 평일 저녁에 누리던 여유가 많이 없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 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있었다. 바로 첫 차, 첫 메달, 첫 서명본.
첫 차
차를 샀다. 나름의 기제가 있었지만, 하여간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소비였다.
나는 자차가 필요한 상황과는 거의 정반대에 놓인 사람이다. 일단 재택근무자다.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집에 있을 수 있다. 이동하고 싶으면 9호선 급행이나 합정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태우고 다녀야 할 가족도, 함께 놀러 나갈 애인도 없다. 병원같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곳은 더욱이 없다. 운전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감가를 고려하면 사치만도 못한 충동이었다.
다만 이번 여름이 유난히 더웠고, 또 그 와중에 세종과 서울 근교를 오갈 일이 더러 있었고, 게다가 본가에 가니 아버지가 나 때문에 왕복 한 시간 반을 운전하셔야 했고⋯. 운전을 능숙하게 하고 싶은, 또 자차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 건 그야말로 내 손아귀 바깥의 일이었다.
필요에 의한 욕망이 아니기에 더 위험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 같았다. 형이라면 스파이크 스트립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형은 차를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연달아 제시해 바퀴에 펑크를 내버렸다. 다만 내 욕망이 알고 보니 탱크였을 뿐.
그래도 형과의 대화로 바뀐 게 하나 있다면, 원래 알아보던 준대형 세단을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차가 있는 걸 선호하는지, 내가 운전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이번 구매에 힘을 주는 건 과연 옳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불씨와 씨름하던 중, 차를 사고 싶은 이 욕망도 'Fast Fail'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적을 바꿨다. 향후 반년 간 최소한의 금액으로 자차를 보유해 보는 것. 크고 무거운 시도에서 작고 빠른 시도가 되니 일사천리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10년 된 보라색 스파크를 400만 원 조금 안 되는 가격에 샀다. (친구는 나보다 더 신 나, 차 받는 날 우리 집에 행차해 인수를 함께했다.) 월요일 밤에 생각을 바꾸고 목요일 오후에 구매했으니, Fast Fail에는 7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첫 차가 집 앞으로 배송되었다.
첫 메달
차를 받은 다음 날 바로 하남까지 내달렸다. 10킬로미터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단지 살을 빼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거라 대회에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근데 친구들이 이번 여름엔 여행 대신 마라톤 대회를 나가자고 해 그야말로 얼떨결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됐다.
현 직장의 매니저도 달리기를 좋아하시는데, 대회 참가 소식을 알리니 "대회에 나가서 처음 10킬로미터를 완주해 보는 게 좋다. 그 희열을 미리 느끼지 마라."라고 조언하셨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10킬로미터 완주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채 출발선에 섰다. 7킬로미터 정도는 적당한 속력과 적당한 심박수로 뛸 수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처음 4킬로미터 정도까지는 실제로 괜찮았다. 속력도 잘 유지했고 심박수도 존3에 머무르고 있었다. 근데 그 뒤부터 미친 듯이 심박수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온몸에 전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명균이 형이 담마코리아에서의 경험을 돌이키며 "고통이 전기 신호라는 걸 느꼈다"는 식의 말을 했었는데, 달리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욕심이 번뇌를 만든다. 내가 기록 욕심을 내게 될 줄은 몰랐다. 뛰기 직전까지도 친구들에게 무릎이나 발목에 이상 신호가 조금이라도 오면 중도 포기할 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막상 5킬로미터 지점을 지나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니 호승심이 불타오르더라.
문제는 7~8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이때부터 슬슬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고, 참가 인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좁은 폭의 도로는 나를 가로막았다. 속력과 호흡이 들쑥날쑥해져 시간과 체력 모두에서 손해를 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냥 마음을 놓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9~10킬로미터 지점에서 이 손해를 상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마지막 1킬로미터의 분당 평균 심박수가 197이었다. 이 구간 내내 오아시스의 <All Around the World>가 내 귀에 울리던 것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쨌든 기록은! 목표했던 1시간보다 딱 3.04초 빠른 59분 56.96초. 마지막까지 속력을 줄이지 않고 쭉 들어온 게 주효했다.

바로 결승선 옆쪽으로 빠져서 대자로 뻗고 생수를 온몸에 부었다. 친구들이 나를 찾지 않아 정신이 조금 든 뒤에야 접선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한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으리란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단다.
어쨌든 그렇게 첫 메달을 받았다. 마지막 메달일지도 몰라 각인까지 야무지게 했다.
첫 서명본
회복하며 며칠을 보내다, 수요일에 더스윙에서 공유 모빌리티 서비스 스윙을 만들고 계시는 우혁 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우혁 님과 나는 퍼스트 펭귄이라는 좀 기묘한 곳에 함께 속해있는데, 여기서 이루어진 자선 경매에서 우혁 님이 나의 물품을 아주 높은 가격에 입찰해 주셨다. 고맙고 황송한 마음으로 더스윙의 사무실이 있는 용산에 찾아갔다.
우혁 님께 낙찰된 물품은 <미르메콜레온>이라는, 나의 초단편 소설이 수록된 책이다. 물론 텀블벅 펀딩 때 후원자 - 사실상 구매자 - 로 이름을 올리는 분들이 계시는 건 봤었지만, 누군가 내 눈앞에서 내가 저자로 참여한 책을 욕망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느꼈다.
책을 서명과 함께 전달해 달라고 하셔서 말을 고르고 골라 짧은 문장 두 개를 지어냈다. 마라톤 대회 책자에다 연습해 본 뒤 책에 아주 신중히 옮겨적었다. 첫 서명본이었다.
타성에 젖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서명과 그 옆에 적힌 두어 문장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만들어지는 비밀이다. 나는 비밀에 더해 약속까지 하나 했다. 독자와 만든 첫 비밀, 첫 약속.
어쨌든 그렇게 첫 서명본을 만들고 또 전달했다. 그러고 나니 글쓰기에 더욱 큰 책임과 애정을 느끼게 됐다. 나의 글이, 거기에 담긴 생각이 인정받고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더 크게 소망하게 됐다.
이렇게 8월이 지나가고 있다. 처음만큼 유일하고 그래서 더 특별한 게 또 있을까. 올해의 남은 4개월 동안에 나를 찾아올 처음들에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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