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칸트인가>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이렇게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그 보편성에 있어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 보여주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왜 칸트인가>는 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해설한다. 꼭 읽어봐야 할 책.

올해 읽은 책 3선에 꼽힐 것 같은 책이다. 칸트 철학 그 자체도 당연 인상적이었지만, 어렵기 그지없는 그 철학을 적당한 밀도의 전문성과 대중성으로 풀어낸 저자의 노력과 능력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해 진, 선, 미, 달리 말해 인식의 능력, 욕망의 능력, 감정의 능력에 관한 문제를 탐구한다. 이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문제들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문제들을 해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칸트는 기존의 질서, 곧 각 영역에서 무엇이 중심에 위치하고 주변에 있었는지를 전복한다. 진의 영역에서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 주체를 중심에 둔다. 선의 영역에서는 좋음이 아니라 법칙을 중심에 둔다. 미의 영역에서는 개념(보편)이 아니라 사실(특수)을 중심에 둔다. 마지막으로 원인과 관계를 전복하며 기계론적 자연관에 유기체적 자연관을 마주 세운다. 이것이 칸트가 일궈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긴밀히 맞닿아 있다. 내용 하나하나보다도 이러한 탐구 방식이 더 큰 놀라움을 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정합적이고 연속적인지, 괜히 서양철학이 칸트로 들어와서 칸트에서 나간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 주체의 마음, 그 작동 원리를 탐구한다. 이때 비판이란 분석하고 정초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제목의 뜻은 곧 '순수이성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이다. 이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칸트가 이 책에서 진행한 연구를 쭉 따라가 보아야 한다.
칸트 이전의 인식론에서는 대상이 우위였다. 대상은 주체와 독립하여 존재했고, 그 대상을 거울처럼 바르게 비추는 인식이 옳은 인식이었다. 하지만 칸트는 대상을 주체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오로지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상에 대한 주체의 현상(現象)이다. 이에 칸트는 주의를 주체의 마음, 곧 감성, 상상력, 지성, 이성과 같은 여러 인식능력들로 이루어진 그것으로 돌린다. 이런 인식능력들이 물자체(나는 이를 일종의 이데아로 이해하고 있다. 실재론적 실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를 현상할 수 있게끔 하는데, 이 인식능력들의 작동 원리는 선험적(a priori)이다. 바꿔 말하면, 선험적 형식 없이는 경험(인식) 또한 없다.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 원리들이 자리하는 장소를 초월론적 차원이라고 명명한다.
이제 인식론은 우리의 경험을 탐구함으로써 이뤄진다. 그리고 경험을 탐구하는 것은 곧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의식에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형식적 원리들을 탐구하는 것과 동치다. 따라서 칸트의 인식론은 의식의 해부다. 의식을 해부해 순수이성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영역을 구획하는 것, 그것이 <순수이성비판>이 취하고 있는 인식론에 대한 태도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 바깥의 것, 곧 형이상은 인식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칸트가 초월론적 차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는 초월론적 차원이 객관적 실재라는 관점을 담지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이는 발명이나 정립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 형이상(=초감성=물자체)과 형이하(=감성=현상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체로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연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찾아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초월론적 차원에는 감성, 상상력, 지성(오성), 이성이 자리한다.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으로 물자체를 직관한다(현상계에 위치시킨다). 칸트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은 의식과 독립적으로, 곧 절대적 시공간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은 양, 질, 관계, 양태라는 4개의 상위 범주 아래에 존재하는 총 12개의 범주를 통해, 감성에 의해 주어진 내용을 개념으로 종합한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때 상상력은 감성과 지성을 매개한다. 상상력은 감성에서 출발해 지성에 도착할 때 '종합'을 수행하고, 지성에서 출발해 감성에 도착할 때 '도식화'를 수행한다. 추상적인 개념과 감성적 직관을 매개하는 그 연결자가 바로 도식이다. 도식은 마치 머릿속의 삼각형처럼 감성적이면서도 지성적이며, 직관적이면서도 개념적이고,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이다. 정리하자면 감성은 직관하고, 지성은 개념을 적용하여 판단하고, 상상력은 이 둘을 매개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이성인데, 이성은 경험과 지식을 체계화하기 위한 추론 능력이다. 칸트는 체계 안에 놓인 지식만이 이론적 지식의 자격을 얻는다고 본다. 체계화의 원리(구심점)는 바로 이념인데, 칸트는 세 가지 이념을 제시한다. 바로 영혼, 우주, 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식 및 실천은 이 세 가지 이념을 구심점으로 하여 체계적 질서를 얻는다.
이제 다시 '인식론' 연구서로서 <순수이성비판>으로 돌아오자. 칸트는 '순수이성(=사유)'의 영역을 '구획(=비판=정초)'함으로써, 인식(=감성, 지성, 상상력)의 영역을 확보한다. 인식은 선험적 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험과 다름이 아니다. 이에 반해 칸트의 '사유'는 말 그대로 '생각함'을 의미한다. 경험과 생각함은 별개의 것이다. 사유는 인식의 영역 바깥에서 이뤄진다. 칸트에 따르면 사유는 객관적 원천으로 이념을, 주관적 원천으로 관심을 가진다. 사변적 관심, 실천적 관심, 향유적 관심이 사유를 촉발시키는 바로 그 관심이다. (첨언하자면, 이 세 가지에서 각각 비롯된 물음이 바로 3대 비판서가 각각 탐구하는 바로 그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 물음들을 해명해 나감에 있어서 각각 지성, 이성, 판단력이라는 인식능력을 주로 다룬다.)
역순으로 다시 정리를 해보자. 이성은 이념과 관계되어 지식과 실천에 체계적 질서를 부여한다. 이러한 능력은 인식보다는 사유와 관계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갖고(물론 칸트 철학에서의 관심과 일상적 용어로서의 관심은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우주, 신, 영혼의 이념을 구심점으로 하여 정리한다. 이는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이다. 사유가 풀어나가고자 하는 질문 중 인식론적 질문, 곧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성이다. 지성이야말로 수학 및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이론적 인식을 이끌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성의 자리는 없다.
한편, 이론적 인식의 문제는 결국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다.
언어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분석적 참과 종합적 참, 선험적 참과 후험적 참, 필연적 참과 우연적 참의 차이를 배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각각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그 뿌리를 둔다. 분석적 참은 명제의 참이 의미만으로 결정되는 경우에 해당된다. 가령 "총각은 남자다"와 같은 명제가 이에 속한다. 한편 종합적 참으로는 "오늘 맑다"와 같은 명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단어 사이의 의미 관계만으로는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없다. 선험적 참은 명제의 참을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 후험적 참은 경험과 독립적으로는 명제의 참을 알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총각은 남자다"는 선험적 참, "오늘 맑다"는 후험적 참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에서 잘 드러나듯, 많은 경우 분석적 참과 선험적 참이 동치, 종합적 참과 후험적 참이 동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석적 참은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인식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후험적 참은 경험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그러니까 우연적인 참이기 때문에 보편적 타당성과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 칸트가 천착하고자 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과 같은 경험과학이 단지 개연적이거나 확률적인 타당성 정도만을 가지는 지식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마음의 선험적 원리에 기반을 두고, 보편적 또 필연적으로 참이면서도 동어반복이 아닌, 실제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경험적인 관찰, 가령 실험으로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는 경험과학을 생각해 보자. 기존의 관점에서 이것은 전적으로 후험적 참에 속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경험적 인식의 발생은 언제나 선험적 형식에 빚을 진다. 반대로 형식과학, 예를 들면 수학의 명제들은 그 연역의 과정에서 매 단계 직관을 요구한다. 가령 기하학적 연역은 공간적 직관을 끌어들인다. 따라서 이들은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직관을 요구로 하는 종합적 명제이기도 하다. 공간적 직관은 감성에 속하고, 감성은 우리의 인식능력 중 하나이니 말이다.
이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형이상학을 신학에서 해방시킨다.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중요했던 기존의 형이상학은 그 답을 신학적 가설에서 찾았다. 가령 데카르트는 뒤집는 신 존재 증명을, 라이프니츠는 예정 조화를 들어 이를 설명했다. 그러나 칸트 이후, 이러한 문제는 인식능력들이 얼마나 조화롭게 일치하느냐의 문제로 대체된다. 의식을 초월하는 신의 존재는 이 문제의 해결에 필요 없다.
시간의 절대성도 허물어진다. 시간은 더 이상 자연의 규칙적인 운동, 객관적인 사태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마저도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 불과하다. 이제 시간은 의식 안으로 귀속된다.
마지막으로 철학적 이성이 수학적 이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7세기의 과학혁명 이후 이성은 수학적 이성을 의미했고, 합리성이란 수학적 합리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수학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가 구분된다. 수학은 정의에서 출발하여 지성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지만, 철학은 이성의 힘으로 여러 종합의 과정을 거쳐 정의(definition)에 도달한다.
이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두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킨다. 좋음과 법의 도치가 그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 윤리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왔다. 그것은 항구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원리여야 했으며, 영원한 진리, 신적인 것, 올바른 이성 사용 등이 그 예로 자리했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그 자체로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적인 좋음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지켜야 할 법칙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칸트 이후 선악은 도덕법칙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경험과학의 발전이 <순수이성비판>에 영향을 주었듯, 당시 칸트가 직면했던 사회 상황이 이에 영향을 주었다. 근대에 이르러 도시는 출신, 교육 배경, 종교적 신념 등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각기 다른 문화를 관통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사실상 설정할 수 없다. 오히려 꼭 지켜야 할 최소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무조건 따르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따라서 법 중심의 윤리학은 근대의 필요이자 산물이다. 이제 이 의무의 윤리학은 이상적인 인간이 아닌, 이상적인 법칙을 묻는다. 개인에게 자유를, 사회에게 정의를 허락하는 법칙을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 도덕법칙이 공동체에 의해 주입되는 규범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 자신의 양심 속에서, 자유의 체험 속에서 깨닫는 것이다. 자유는 도덕법칙을 배태하고, 다시금 그 자신이 꽃피운 도덕법칙을 통해 체험된다. 따라서 도덕법칙과 자유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불가분의 관계다. 자유는 도덕법칙의 원천이자 존재근거이고, 도덕법칙은 자유의 구체적인 증거다. 동일한 사실의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으로서 존재한다.
이때,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 인격성이 자리하는데, 이 인격성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존엄성을 얻는다. 절대적 존엄성, 이는 '목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칸트의 법 중심 윤리학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도덕법칙은 결국 자유의 해명과 동치요, 이러한 해명은 인격적 존엄성의 증명이기도 하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곧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와 도덕법칙은 순수이성의 유일한 선험적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윤리학이 가능하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더 이상의 소급이 불가능한 그 어떤 사실(동전)이 존재하며, 그 사실의 두 측면(동전의 양면)이 도덕법칙과 자유라는 것이다. 칸트는 자유의 객관적 실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윤리학의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 "어떻게 순수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모든 인간 이성은 전적으로 무능력"해진다.
칸트는 왜 증명 불가능한 그 자유를 원초적 사실(brute fact)로 요청했을까? 나는 두 가지 맥락이 하나로 귀결되며 이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뉴턴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다. 아이작 뉴턴은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이른바 뉴턴역학의 시대를 열었다. 뉴턴역학 시대의 시작은 곧 기계적 결정론의 시작을 의미한다. 기계적 결정론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라플라스의 악마'를 들 수 있다. 1814년 라플라스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특정 시점에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어, 고전 역학의 법칙들을 활용해 모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려줄 수 있는 가설적 존재를 제시한다. 기계론적 결정론하의 전지적 존재, 그것이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다. <실천이성비판>은 1788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 라플라스의 악마와 직접적으로 얽혀있을 수 없다. 하지만 라플라스의 악마는 일례일 뿐이다. 자연의 모든 요소가 물리 법칙하에 인과적 필연성을 띤다면 우리의 행위도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계적 법칙에 지배받는 자연의 한 부분일 뿐 아닐지 설명해 내는 건 칸트에게도 큰 숙제였을 것이다. 특히 윤리학은 자유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만약 인간의 행위가 자유로울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사실로서의, 이른바 '초월론적 자유'는 경험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윤리학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었을 것이다. 현상계와 독립되어, 그 배후의 예지계에서 일어나는, 사유하는 주체의 순수 자발성, 그로서의 초월론적 자유.
예지계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판단은 다섯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둔다. 의지, 존경, 자율, 정언명법, 그리고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의지는 욕망의 일종이다. 욕망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인데, 욕망을 자극하는 요소는 감정, 돈, 술 등 다양하다. 양심도 욕망을 자극하는데, 이상적인 법률가의 양심, 곧 가장 정의로운 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양심이 욕망을 자극할 때 이를 '선의지'라고 부른다. 칸트는 "오로지 선의지만이 절대적으로 선하다"라고 되풀이한다고 한다. 선은 이상적인 법칙의 조건을 스스로 찾고 실천할 때 생기는 의지의 속성에 불과하다. 행위, 도덕, 실천에 있어 주체는 의지다.
존경은 바로 이렇게 생긴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도덕법칙이 이성의 유일한 선험적 '사실'일 때, 존경은 이성의 유일한 선험적 '정서'다. 존경은 도덕법칙을 따르는 실천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자율은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로서, 자기입법 능력을 핵심으로 한다. 살펴보았듯 칸트는 도덕적 주체를 법 앞에 세워 법에 예속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이 주체가 예속되는 법은 자기입법의 결과물뿐이다. 곧, 자기입법 능력을 핵심으로 하는 바로 이 자율은 의지로 하여금 법 저편의 자유를 실감하게 한다.
이때, 자기입법의 결과물인 이상적인 법은 보편적인 형식만을 지시해야 한다. 특수한 내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한편으로 준칙(격률)과, 다른 한편으로 가언명법과 대조를 이룬다. 준칙은 사람마다 다르게 가질 수 있는 행동규범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규칙이 아니다. 정언명법은 그 준칙들이 특정한 형식적 조건을 따르도록 명령하는 상위의 법칙이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그 준칙을 통해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의지하라)"라는 대표적인 정언명법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언명법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러한 목적 지시 조건문은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성립한다는 점에서 역시 정언명법과 대조된다.
의무는 도덕적 판단의 마지막 귀결로서의 도덕적 행위를 의미한다. 의무는 객관적 조건으로 합법성을, 주관적 조건으로 도덕성을 가진다.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더라도 도덕법칙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면 도덕적 행위라고 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촉발되어,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행위만이 도덕적 행위다.
이제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윤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 이 두 학파의 주장을 이율배반으로 결합한다. 두 주장 모두에 타당성을 부여하되 그 끝에는 모순이 있도록 마주 세운다. 스토아주의의 윤리학은 쾌락을 포기하고 규칙 준수와 자기 절제를 통한 좋음을 추구한다. 한편 에피쿠로스주의는 쾌락을 통한 좋음을 추구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 두 학파가 제시하는 좋음은 각각 최고선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최고로 좋은 것은 쾌락과 덕성의 합치여야 한다.
칸트는 역사적 진보가 바로 이 합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곧 도덕성과 쾌락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져 최고선의 이념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역사적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동시에, 시간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현상계에서는 이 배타적인 두 가치가 접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이에 칸트는 최고선의 가능성을 현상계 저편의 예지계에 설정한다. 더불어 이를 위해 영혼 불멸, 신, 자유를 요청한다. 죽지 않는 영혼을 통해 끝없이 최고선에 가까워지는 것, 도덕적 삶의 보상자로서의 신, 이 두 이념과 관계하며 윤리를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자유. 이 전제가 최고선을 가능케 한다.
다시 한번 역순으로 톺아보면, <실천이성비판>은 결국 초월론적 자유를 발판으로 의지의 자율이라는 적극적인 자유 이념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자유의 이념은 이성 체계 전체의 마룻돌이다. 예지계의 모든 이념들은 이런 실천적 자유와 연결될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칸트의 경탄과 외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칸트의 이러한 시도는 근대적 개인의 발명과도 맞닿아 있다. 선 중심의 윤리, 곧 덕 윤리는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 문화적으로 통일된 사회 구성원을 상정하므로, 공동체주의와 함께 간다. 그러나 법 중심의 윤리, 곧 의무의 윤리는 개인주의와 함께 간다.
이제껏 살펴본 이론적 판단과 실천적 판단은 각각 개념과 법칙이라는 보편자를 중심에 놓고, 이를 통해 특수한 대상이나 행위, 곧 개별자를 규정한다. 이러한 판단을 '규정적 판단'이라 부른다. 이에 반해 심미적 판단은 특수가 선행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보편으로 나아간다. 칸트는 뒤에 살펴볼 목적론적 판단과 함께 이러한 유의 판단을 '반성적 판단'이라 규정한다.
<판단력비판>에서의 판단력은 '보편과 특수를 연결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쾌-불쾌의 영역은 한편으로는 앎과,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이어진다. 따라서 판단력은 그 각각의 입법자인 지성과 이성의 중간에 위치한다. 지성의 입법 원리는 범주고, 이성의 입법 원리는 이념이라면, 판단력의 입법 원리는 합목적성이다. 심미적 판단은 개념적 규정을 초과하는 듯한 특수한 심미적 쾌감에 주관적 합목적성을, 목적론적 판단은 개념적 규정을 벗어나는 듯한 특수한 생명 현상에 객관적 합목적성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규정 가능한 것으로 자리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개별자가 규정 가능한 것, 곧 보편자로서 경험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향유한다. 그렇다면 합목적성에서의 목적성이란 무엇인가? 주관적인 측면에서 이는 '인식능력들 사이의 자유로운 일치'며, 객관적인 측면에서 이는 '유기체를 생산하는 목적인의 이념'이다.
먼저 <판단력비판> 전반부에 다뤄지는 칸트의 미학을 살펴보자. 예술 철학(미학)은 크게 세 가지 구심점을 가진다. 예술가, 예술작품, 감상자가 그것이다. 칸트는 예술가에 관해서는 '천재'를, 예술작품에 관해서는 '감성적 이념'을, 그리고 감상자에 관해서는 '취미 판단'을 논한다.
칸트는 예술가를 천재라 부른다. 천재는 자연을 대신하여 예술적 재현의 규칙을 새롭게 제정하는 창조적 인간이다. 이 규칙은 감성적 이념을 현시하는 규칙인데, 천재의 규칙 제정은 무의식적이어서 설명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감성적 이념은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원리, 영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독창을 자극하는 원리다. 어떤 생동하는 마음들은 언어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특수한 사례들이 보편적인 개념으로 분류, 규정, 설명되기를 요구한다. 살펴보았듯 실천과 지식 따위에 체계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이념이다. 따라서 이때 바로 '감성적' 이념이 작동한다. 감성적 이념은 판단력에게 물음을 제기하고, 판단력은 반성적으로 해답을 찾아간다. 감성적 이념이 초감성적 이념, 곧 자유 등과 관계될 때 사유는 멈추고 쾌감을 향유한다.
이제 우리에겐 감상자만이 남는다. 감상자의 심미적 체험, 곧 취미 판단은 두 가지 조건을 가진다. 기존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아 감성적 이념이 작동한다는 객관적 조건과, 감성적 이념 앞에서 마음의 생기를 띤 인식능력들이 자유롭게 유희해야 한다는 주관적 조건이 그것이다. 취미 판단에 있어 인식능력들은 자유롭게 유희하다가 조화로운 일치, 곧 공통감에 도달한다. 이는 이론적, 실천적 판단에서 인식능력들이 개념과 법칙의 제약을 받는 것과 반대된다.
취미 판단에는 무관심한 만족감(질), 목적 없는 합목적성(관계), 개념 없는 보편성(양), 개념 없는 필연성(양태)이라는 네 가지 계기가 있다.
무관심한 만족감은 칸트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때 무관심이란 사변적 관심, 실천적 관심, 향유적 관심 등을 포함한 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심미적 만족감은 우리의 관심이 충족되는 감각적 쾌감, 지적인 쾌감과 구분된다. 오히려 판단력이 전적인 무관심에 머물 때에야 비로소 심미적 체험이 가능하다. 인식능력들이 외부의 어떤 관심사에 정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유로운 유희를 할 수 있도록 자율적 관계 속에서 준비된 상태, 그것이 심미적 판단의 첫 번째 계기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작용한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이룬다.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전체가 있으나 중심과 의도는 없는 관계. 이 관계는 순수 형식적 관계로, 그 형식이 담고 있는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오묘한 형식적 조화를 경험하면 우리의 마음은 순수한 자기감응, 자기원인적인 응시에 빠져든다.
취미 판단은 쾌감에 대한 음미뿐 아니라, 음미된 쾌감의 가치를 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질과 관계의 계기가 쾌감의 음미에 관한 문제에 관해 단서를 제공한다면, 양과 양태는 쾌감의 가치와 타당성의 문제에 관해 논의한다. 그렇다면 이론적이거나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취미 판단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심미적 쾌감은 무관심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만약 심미적 쾌감이 특정한 관심이 만족될 때 오는 것이라면, 동일한 관심을 지니지 않는 개인에게는 공통의 만족감이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취미 판단은 무관심을 그 계기로 가지기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취미 판단은 개념적 규정을 초과하는 사태를 마주할 때 일어난다. 인간은 동일한 구조의 인식능력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도 보편성이 성립한다.
개념 없는 필연성은 이와 유사하지만, 보편성은 초월론적 차원에서의 가능성인 한편, 필연성은 경험적 차원에서의 사실적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개인적인 취미 판단이 타인에게 전달되고 인정될 수 있기 위해서는 당위적으로 타인의 관점에서 먼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공통감의 원리하에 개인의 취미 판단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동의를 얻게 된다.
공통감의 원리는 일종의 도덕적 관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관심성과 배치되지는 않는다. 칸트는 무관심에서 출발하는 취미 판단 속에서, 도덕적 관심으로 향하는 추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심미적 판단에는 취미 판단 외에도 숭고 판단이 있다. 숭고 체험도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을 가지는데, 객관적 조건으로는 상상력을 초과하는 압도적인 크기나 힘이 있다. 주관적 조건으로는 판단 주체가 무능력과 상실을 경험하며 표상과 파악이 불가능해진다는 것과, 추상적 사유, 곧 이미지 없는 사유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판단 주체가 압도적인 대상을 마주할 때, 표상은 형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인식은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인식의 불능은 사유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숭고는 무능력이 야기하는 불쾌감, 사유의 갱신과 확장이 야기하는 쾌감을 두루 겪는다. 인식능력들은 숭고 체험에서는 도저히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방식의 일치, 곧 불일치의 일치에 도달하는데, 이는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일치다. 숭고 체험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이념 앞에 자리한다. 아름다움의 체험이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라는 것과는 반대된다. 숭고 체험은 다른 여타 판단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마주한다.
숭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수학적 숭고요, 다른 하나는 역학적 숭고다. 수학적 숭고는 크기에 의해서 유발되며, 역학적 숭고는 힘에 의해서 유발된다. 수학적 숭고는 상상력과 이론 이성의 일치를 이끌고, 역학적 숭고는 상상력과 실천 이성의 일치를 이끈다. 숭고는 우리가 심려하고 있는 것을 작은 것으로 간주하게끔 한다. 그리고 우리 안의 또 다른 힘을 일깨워준다. 그 힘은 바로 우리 이성의 유일한 선험적 정서인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나오는, 도덕적 소명의식이다. 숭고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럴 때에만 그것을 숭고라 일컬을 수 있다.
이렇듯 미와 숭고에는 도덕의 가능성, 최고선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자연세계와 자유세계, 현상계와 예지계, 기계적 필연성과 초월론적 자유 사이의 통합 가능성, 곧 최고선의 가능성이 미와 숭고에 있다.
칸트의 마지막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판단력비판> 후반부에 다뤄지는,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으로의 전회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생물학적, 목적론적 자연관을 붕괴시켰다. 수학 공식은 자연의 존재론적 문법이 되었으며, 사물의 운동은 수학에 종속되는 기계적 인과관계의 결과에 불과하게 되었다. 유기적 생명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칸트는 지성의 관점에서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받아들였지만, 이성의 관점에서는 유기체론을 견지했다. 유기체론은 과학적 자연 탐구를 지도하는 발견적 원리다. 이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요, 지성이 아닌 이성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우리가 자연에 투사하는 원리일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성이 이론적 지식의 습득 과정 자체에 기여해서는 안 되며, 그 지식들이 하나의 체계에 편입되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유기체론과 목적론적 판단 원리는 그런 관점에서 과학적 발견들을 체계화하는 지도 원리다. 인간의 무지를 탐구하는 과학이 자연의 신비와 우연, 의미와 목적의 부재에 부딪칠 때 잡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다.
기계론은 외적인 목적을 중심에 두는 반면 유기체론은 내적인 목적을 중심에 둔다. 즉, 전자는 서로 다른 부분들이 외부의 계획에 따라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고 보지만, 후자는 전체의 계획이 이미 내적으로 주어진 상태에서 그 계획에 따라 부분들이 결합한다고 본다. 한편, 전자에서의 인과성은 일방향적이고 비가역적인 반면 후자에서의 인과성은 양방향적이고 가역적이다.
외부의 주어진 계획과 목적에 따라 생산된 인공적 산물은 전자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칸트가 후자에 귀속시키는 생명체는 자기 안에 내재하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 존재다. 칸트는 이러한 이상적인 생명체를 '자연목적체'로 정의한다. 자연목적체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한다. 유기체에서 대개 원인은 결과가 되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양방향적인 인과성이 목적의 내재를 의미한다.
칸트는 이제 자연 전체를 단일한 유기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전체로서의 자연은 하나의 내재된 단일한 목적을 지닌다. 이 대목에서 목적론적 판단이 개입된다. 목적론적 판단에는 네 가지 계기가 있는데, 첫 두 가지 계기는 앞서 살펴보았던 내적 합목적성과 외적 합목적성이며, 뒤의 두 가지 계기는 최종 목적과 궁극 목적이다.
칸트는 인간을 창조의 최종 목적이자 궁극 목적으로 제시한다. 자연을 능가하는 인간의 능력은 문화와 윤리다. 문화적 역량과 도덕적 역량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만든다. 이때 문화적 인간은 자연의 최종 목적이오 도덕적 인간이 창조의 궁극 목적인데, 둘에는 차이가 있다. 문화적 인간은 특정 목적을 계획하고 수단을 통해 실현한다. 반면 도덕적 인간은 모든 목적-수단 관계에서 벗어나고, 다른 어떤 목적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법칙을 제정한다. 도덕적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목적들의 연쇄가 완벽하게 정초되는 최고의 목적이다.
칸트가 상정하는 도덕적 인간은 법칙 수립자인 동시에 신을 요청하는 인간이다. 그것은 최고선의 가능성을 희망하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은 최고선의 이념에 대한 성찰 속에서만 완전히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칸트의 시도는 '무의미한 자연 구제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얼핏 이 구제자로서 신을 요청하는 것이 구시대적이라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칸트 철학에서의 신은 다른 모든 것 위에 적극적 또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신이 아니며, 신학 역시 다른 학문 위에 위치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가치가 사라져버린 자연에서 다시 의미와 목적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을 주는 이념적 존재자일 뿐이다.
이렇게 <판단력비판>은 하나로 귀결된다. 이 책의 두 부분은 각각 심리학적 생명 현상과 생물학적 생명 현상을 다룬다. 곧 살아있는 마음과 살아있는 사태를 다룬다. 전자는 마음속의 주관적 합목적성인 공통감을 원리로 하고, 후자는 자연 내의 객관적 합목적성인 자연목적체를 원리로 한다. 아름다운 형식과 유기체의 정교한 구조는 지적설계자로서의 신을 상정하게끔 한다. 미와 숭고와 최종 목적과 궁극 목적은 최고선의 가능성과 도덕적 인간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끝에는 제한된 의미에서의 신이 요청된다.
나는 종종 나를 '칸트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고는 했다. 칸트에 관해 제대로 공부하거나 1차 문헌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법칙 중심 철학,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그의 삶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왜 칸트인가>를 계기로 '칸트 같은'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물자체는 존재하지만 인간의 지성과 인식능력은 이를 오롯이 직관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 주체 중심의 현상학, 개별 사례에 우선되는 법칙 중심의 철학 등의 측면에서 내가 그와 비슷하게 사고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는 이후의 철학에 칸트가 영향을 많이 미쳐서겠지만 말이다. 칸트가 자신의 이론 체계를 얼마나 정합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는지도 인상적이었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이렇게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그 보편성에 있어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 보여주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왜 칸트인가>는 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해설한다. 꼭 읽어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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