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무한히 가지 쳐 나가는 가능성의 세계 중 실현되는 세계는 단 하나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세계는 어느 사소한 것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실현되지 않았을 아주 유일한 세계다.
나조차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입 밖으로 나올 때가 있다. 한 달 반 전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래도록 어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왔다. 나의 20대는 사실상 염원의 시간이었다. 신을 믿을 때에는 신에게 간구했다. '임재하는 신은 있을 수 없다'는 지금의 가설은 구함에도 주지 않는 그를 원망했던 그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다림은 기회비용을 수반한다. 바라온 바로 그것과 마주치기를 기다리며 뻗으면 쥘 수 있던 수많은 다른 기회를 흘려보냈고, 속절없이 시간은 지나갔다. 이 얘기를 듣던 상대방이 내게 물었다. 그 기회가, 또 그 시간이 아깝거나 아쉽지는 않느냐고.
찰나 동안 지난 몇 년의 세월이 스치고, 피안으로 달아난 줄 알았던 의심과 두려움이 밀물처럼 파도쳐 왔다. 그러나 바로 그때, '기다림이 나의 역할'이라는 단편적인 어구가 내 머리에 들어찼다. 그대로 답을 뱉고는 스스로 조금 놀랐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불현듯 찾아온 걸까.
삶은 인과추론과 예측이 얼마나 오만한지를 시험하듯 엉클어진 채로 약동한다. 거창하지 않은 이유 몇 개가 삶의 경로를 바꾼다. 내 인식 밖의 어떤 자잘한 사건 하나가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한다. 무한히 가지 쳐 나가는 가능성의 세계 중 실현되는 세계는 단 하나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세계는 어느 사소한 것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실현되지 않았을 아주 유일한 세계다. 긴긴 시간,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닿을 수 없었을 그런 세계. 물론 기다림이 항상 열매를 맺는 건 아니겠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누구나 마술을 할 수 있고, 누구나 목표에 이를 수 있소. 사고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으며, 금식할 수 있다면 말이오." 기다림은 외롭고 고달프다. 기다림 그 자체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그 고통을 배가한다. 달음질치는 욕구를 잠재우고 잠자코 기다리는 것 또한 큰 괴로움이다. 하지만 기다릴 줄 알 때 비로소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이번 달, 아주 오랜만에 <잠언>을 읽었다.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는 8장 34절. 성경 구절에 고개를 끄덕이는 날이 다시 올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