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난해한 사휘는 조야할 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中

어떤 작품이 난해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꼭 낮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난해함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재미 - 여기서의 재미는 일련의 감상 행위 중과 후에 오는 모든 종류의 만족감을 지시하므로, 작품의 의미 역시 포함한다 - 가 있기도 하고, 그 작품을 해석하는 어떤 개인이나 사회가 그것을 해독해낼 수 있는 적합한 방법을 갖고 작품을 대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의 심미안과 해석력에 퍽 자부심이 있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달되는 재미를 포착해낼 수도, 또 웬만해서는 작품에 합치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리라 늘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자신감이 과해져 어떤 예술 작품을 독선적으로 평가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내게는 그러나, 그런 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떤 특별한 재미도 풀어내지 못하는,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해독해 내는 적합한 방법을 결여하기까지 한 작품으로 보인다.

영화론의 시작은 영화의 정의일 테다. 나의 영화론에서 영화는 "1초에 약 24장의 사진이 지나가며, 그 사진들의 연결 안에 서사가 담기고, 그 연속성을 소리의 활용 또는 부재가 극대화해주는, 시간의 시청각 예술"이다. 이 정의에 내포되어 있듯,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주제 의식이 영화의 전부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 안에서 그 이미지들이 대관절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가, 즉 더욱 높은 차원에서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와 그것이 그려진 방식은 어떠한 완결성 - 어떤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세계는 영화의 시작, 중간, 끝에서 서로 정합하는가? 그리고 그 세계와 영화가 그 세계를 다룬 방식은 서로 조응하는가? - 을 가지는가야말로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심오한 주제 의식을 담았다는 핑계에 숨어 설명되지 않는 세상에 그럴싸해 보이는 이야기를 욱여넣은 영화는 결코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작품이 내가 관람한 첫(!) 지브리 스튜디오 및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기 때문에, 지브리 스튜디오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 어법, 또는 그들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작품은 어쨌든 홀로 존재할 뿐이다. 언급한 그런 것들을 모를 때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면, 그건 작품이 오롯이 떠안아야만 하는 결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릴 적 얘기, 각 등장인물에 투영된 지브리 스튜디오 사람들을 알아야만 재밌는 영화라면, 그건 재미없는 영화인 게 맞다. 적어도 그들의 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난해한 상징들의 과한 활용으로 마치 무언가 있는 것처럼 만든 것 역시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감독이 의도한 상징들을 찾는 건 물론 영화 감상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점이고, 감독이 의도한 대표적인 상징들을 놓치면 그 영화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기도 하다. 따라서 박한 평가는 사실 부당하고, 이 작품을 재미없게 감상한 건 상징들을 해석해 내지 못한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 각각의 습성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알았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온전하다고 느껴졌을까? 그 서사가 더욱 잘 이해되었을까? 그 세계의 완결성이 나에게 더 와닿았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게다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언급할 수 없는 마지막 부분의 상징 활용은.... 너무 뻔했다.

한 장면 한 장면, 한 소리 한 소리 모두 공을 들인 티가 났고, 또 좋았다. 하지만 시청각에서의 그런 강점을 덮을 만큼 이 영화의 세계는 조악했다. 영화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가 그려낸 세계에 있는 어떤 부조리가 우리로 하여금 무슨 고민을 하게 하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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