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을 망치는 법, CIA가 알려 드립니다.

본질 또는 본질에 닿고자 하는 노력과는 상관없는 것들로 의사결정과 실행을 지연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조직에 잠입한 사보퇴르(Saboteur)다.

조직을 망치는 법, CIA가 알려 드립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을 발간했다. 적 점령지의 시민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이 매뉴얼은 사보타주 지침, 곧 의도적으로 일을 망치는 방법을 소개한다.

매뉴얼의 5장은 '간단한 사보타주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담고 있는데, 그중 11절 '조직 및 생산 일반에 대한 방해 방법'이 아주 흥미롭다. 읽다 보면 우리네 일터가 떠오른다. 경쟁사가 보낸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들이 열정적일수록 조직은 더 망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의 5장 11절을 의역하고, 사이사이 나의 해석과 사견을 덧붙여보려 한다.


5장: 간단한 사보타주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

11절: 조직 및 생산 일반에 대한 방해 방법

  • a항: 조직 및 협의 일반
    • 모든 일을 “채널”을 통해 하라고 우겨라. 신속한 결정을 위한 그 어떤 지름길도 허용하지 마라.
    • “연설”하라. 가능한 한 자주, 아주 길게 이야기하라. 긴 일화와 개인 경험을 예로 들어 "요점"을 실증하라. 적절한 "애국적인" 발언을 함에 망설이지 마라.
    • 가급적 모든 문제를 "추가적인 조사와 검토"를 위해 위원회에 회부하라. 해당 위원회는 최대한 크게 구성하라 - 최소 다섯 명 이상.
    • 가능한 한 자주 사안과 무관한 이슈를 제기하라.
    • 의사소통, 회의록, 결의안 등에 아주 엄밀한 문구가 쓰이도록 다퉈라.
    • 지난 회의에서 이미 정해진 사안을 상기시키고 그 결정의 타당성에 관해 다시금 묻고 논의하라.
    • "신중함"을 지지하라.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동료에게도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하라. 서두르다가 직면할 수 있는 훗날의 당혹스러운 상황이나 어려움을 들어 이를 피하자고 하라.
    • 어떤 결정이든, 그 결정의 정당성과 적절성을 염려하라. 그 결정이 본인이 해당하는 그룹의 관할 아래에 있는지, 더 높은 층위의 정책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물어라.
a항의 정수는 결국 '본질이 아닌 것들로 하여금 의사결정의 복잡도를 높이게 하여, 빠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라'이다.

물론 정해진 절차를 엄격히 따르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법적 및 평판 위험이 커질수록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러워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Y Combinator가 <The Pocket Guide of Essential YC Advice>의 서두에 "Launch now"를 놓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많은 경우 답을 알려주는 건 실행이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결의안에 엄밀한 문구를 쓰는 건 의미 없다.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을 서비스를 아주 신중하게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지만, 또 본질이라는 용어가 두루뭉술한 것도 사실이지만, 본질 또는 본질에 닿고자 하는 노력과는 상관없는 것들로 의사결정과 실행을 지연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조직에 잠입한 사보퇴르(Saboteur)다.
  • b항: 관리자 및 감독자*
    • 문서화하여 지시하라고 요구하라.
    • 지시를 "오해"하라. 끝없이 질문하거나 긴 기간 동안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아라. 가능하다면 지시에 관해 트집을 잡아라.
    • 지시 하달을 지연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라. 지시 사항 중 일부가 준비되었더라도, 그것이 전부 준비될 때까지 전달하지 마라.
    • 재고가 거의 소진될 때까지 새로운 작업 자재를 주문하지 마라. 이로써 당신의 자재를 준비하는 데에 조금의 지연이라도 생기면 가동이 중단된다.
    • 구하기 어려운 고품질의 자재를 주문하라. 받지 못하면 논쟁을 벌여라. 열등한 자재는 곧 열등한 작업을 의미한다고 경고하라.
    • 작업 배정 시, 항상 중요하지 않은 작업을 먼저 배정하라. 중요한 작업은 질 낮은 기계를 다루는 비효율적인 작업자들에게 가도록 하라.
    •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제품에 완벽한 작업을 요구하라. 약간의 결함이라도 있다면 재작업을 위해 돌려보내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결함이 있는 부품들은 오히려 승인하라.
    • 발송에 실수를 만들어, 부품과 자재가 공장의 잘못된 장소로 향하게 하라.
    • 새로운 작업자를 훈련할 때 불충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지시를 주어라.
    • 사기를 떨궈 생산성을 낮추기 위해 비효율적인 작업자를 기쁘게 대하라. 그들에게 가당치도 않은 승진을 시켜주어라. 반대로 효율적인 작업자를 차별하고, 그들의 작업에 정당하지 않게 불평하라.
    • 더 결정적인 일이 완료되어야 할 때 다른 회의를 열어라.
    • 그럴싸한 방식으로 서류 작업을 곱절로 늘려라. 문서를 복제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 지시 사항 하달, 급여 지급 등에 관해 수순과 승인 절차를 곱절로 늘려라. 한 사람이 승인할 수 있는 일을 세 사람이 승인하게끔 하라.
    • 마지막 한 글자에까지 철저히 규정을 적용해라.

* b항의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목에 나오는 영어 표현 'orders'를 지시로 번역했다.

a항이 '의사결정과 실행', 즉 비교적 전반적인 내용에 관한다면, b항은 보다 직접 '생산성'에 관한다. 조직의 생산성은 중간관리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b항을 따르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중간관리자는 다음과 같은 역량들을 보유한다: 우선순위의 똑바른 파악,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능력,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을 용기, 간결하고 명료한 소통, 합리적인 성과 평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또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 c항: 사무직 근로자
    • ​주문서를 복사할 때 자재 주문 수량을 잘못 기재하라. 비슷한 이름들을 혼동하라. 틀린 주소를 사용하라.
    • 정부 부처와 긴 기간 동안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아라.
    • 핵심적인 문서들을 잘못된 곳에 두어라.
    • 먹지 복사본(carbon copy)을 적게 만들어 추가적인 복사 작업이 필요하게끔 하라.
    • 중요한 전화에 대고 상사가 바쁘거나 다른 전화를 받고 있다고 말하라.
    • 다음 수거 때까지 우편물을 부치지 마라.
    • 내부자 정보인양 거짓 소문을 퍼뜨려라.
  • d항: 직원 전반
    • ​천천히 일하라. 작업에 필요한 동작의 수를 늘릴 방법을 생각하라. 가령 무거운 망치 대신 가벼운 망치를 사용하고, 큰 렌치 대신 작은 렌치를 사용하고, 상당한 힘이 필요한 곳에 적은 힘만을 사용하라.
    •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가능한 한 많이 고안해 내라. 작업 중인 자재를 교체할 때, 선반이나 펀치에서 작업할 때처럼 쓸데없이 시간을 끌어라. 자재를 자르거나 모양을 만들거나 다른 측정 작업을 할 때 필요 이상으로 두 번씩 치수를 측정해라. 화장실에 갈 때는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있어라. 도구를 잊고 가서 다시 가지러 가도록 해라.
    • 설령 그 언어를 이해한다고 해도 외국어라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라.
    • 지시를 이해하기 어려운 척하고, 설명을 반복하게끔 하라. 아니면 그 일을 하고 싶어 안달 난 척하며 불필요한 질문으로 감독관을 괴롭혀라.
    • 일을 엉망으로 하고 도구, 기계, 장비 탓을 하라. 이러한 것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하라.
    • 기술과 경험을 새로운 작업자나 요령 없는 작업자에게 전수하지 마라.
    •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행정을 망쳐버려라. 양식을 알아볼 수 없게 작성하여 다시 작성하도록 요구하게 하라. 요청된 정보를 잘못 기재하거나 누락하라.
    • 가능하다면, 관리자들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그룹에 가입하거나 그러한 그룹을 조직하는 것을 도와라. 관리자들이 최대한 불편할 만한 절차를 채택하라: 한 번의 발표에 가능한 많은 직원이 참여하고, 하나의 불만 사항에 여러 번의 회의를 수반하고, 대부분 상상에 불과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등
    • 자재를 잘못된 곳으로 보내라.
    • 양질의 부품을 쓸 수 없는 조각 및 불량품과 섞어라.
c항과 d항은 사소한, 다소 유치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원 하나하나가 제자리에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는 게 중요하다 정도의 함의. 진짜 중요한 건 의사결정과 실행이 전반적으로 어떤 문화 아래에서 이루어지는지, 또 중간관리자가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어느 정도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문제들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스타트업을 위시한 작은 기업들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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