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누군가 나의 죽음에 통탄할 정도로 나를 아끼려면 내가 먼저 그 누군가를 아껴야 했다.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는 것, 그게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였다.

구원
Photo credit: Damien Paeng

언제부턴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벼락처럼 나타나 나의 구원이 되어주리라 믿었다. 왜곡된 상(像)이란 걸 알면서도 쉬이 놓지 못했다.

최근에 내 안의 악의와 광기를 목도하게 한 어떤 사건이 있었다. 퍽 충격적이었는지, 그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나 자신이 나를 구원하지 못할 때 받는 사랑은 마치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에 비치는 볕과 같은 것일 테다. 서넛을 제외하면 말라죽을 뿐. 진정한 구원은 자기완결적이어야 한다.

곧이어 외부 의존성 없이 구원에 이르는 방법, 소위 '자구안(自救案)'을 모색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토록 찾아 헤맨 '구원'이 대관절 무언지 고민하게 됐다. 그 애매한 개념의 꺼풀을 벗겨 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이를 수 있는 것'이라는 순환적인 속살이 드러났다.

나의 추상적 신념의 이면에 있는, 진정 얻고 싶었던 것이 무언지 정의해야만 했다. 그러다 내가 '구원'이라 칭해온 것을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고, 나는 그 세상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 정도로 정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