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치밀하게 설계된 정답 없는 퍼즐.

경기를 일으키고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말 중에 "영화는 메시지"라는 말이 있다. 그건 마치 "노래는 가사"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영화에는 이야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그것을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 이와 조응하는 사운드, 이로써 전달되는 메시지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 그 요소 하나하나가 얼마나 훌륭하고, 서로 얼마나 정합하는지가 좋은 영화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음치 박치의 보컬이 좋은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고 그 노래를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단지 메시지가 좋다고, 또는 메시지가 좋지 않다고 영화가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관점에서, <괴물>을 훌륭하게 만드는 건 메시지만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하며 시작하고 싶다. 깊이 있고 무게 있는 탓에 어쩌면 충분히 새롭지는 못한 메시지가 치밀한 작법과 연출을 만나, 우리의 뇌리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오는 것. 진실과 천진함에 관해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 <괴물>이 가지는 힘일 테며, <괴물>이 비로소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일 테다.
이 영화는 "괴물은 누구게"라는 퍼즐을 세 가지, 보기에 따라서는 네 가지 시선을 따라 펼쳐놓는다. 첫 번째로 미나토의 엄마인 무기노 사오리의 시선, 두 번째로 미나토의 담임 선생님인 호리 미치토시의 시선, 아주 짧게 교장 선생님의 시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무기노 미나토의 시선. 관객은 각각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퍼즐을 풀고자 한다. 순차적으로 모든 것의 원흉을 찾는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심지어는 어떤 한 아이가 괴물인가까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내 그 끝에 괴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자의 맥락만이 있을 뿐. 물론 결코 용인되지 않는 행동을 한 인물이 하나 있고, 일견 그가 모든 것의 시작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의심의 끝에 맞닥뜨리는 것이 또 다른 맥락임을 알게 된 관객이라면, 시선이 그에게까지 닿지 않았을 뿐, 그에게 모든 사건을 기인할 수 없을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무책임하게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 시선으로 사실을 재단하거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거나,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의 거짓말을 하거나, 방화를 한 사실이 뒤로 미루어지지 않는다. 더불어 앞으로 나아감, 곧 기차의 방향이 있고, 구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지향이 전제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어떤 하나의 진실에 가닿기 어렵다는 하나, 진실 내지 선과 악이라는 가치가 아예 없다는 다른 하나의 태도 사이에서 전자, 곧 불가지론을 취하고 있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러한 메시지, 또는 주제의식은 사실 이미 많이 있어왔다. 두 개 이상의 시점으로 서술된 영화는 많든 적든 이러한 주제의식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불어 둘 이상의 시야가 펼쳐지다 하나의 시간으로 포개어지는 전달 방식 역시도 많이 쓰인 방식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소설로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영화로는 <덩케르크>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위대함은 두 번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치밀하게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 그리고 중요한 기점들이 설정되어 있다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이런 유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놓친 부분들 때문에 다시 보고 싶거나, 어차피 엉성하기에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나. 하지만 이 영화는 각자의 시점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포개어 놓아서, 굳이 두 번을 보지 않아도 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여 두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닳고 닳은 이야기 전개 방식이 그간 쉽게 해결해 내지 못했던 치명적 결함을 풀어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평을 받아야 마땅할 테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들이 몇 더 남아있다. 첫째로 선명한 상징이다. 불과 물, 비 내리는 도시와 비 그친 뒤의 들판, 동굴을 통로로 나뉘는 두 공간 등, 아주 분명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항들로 이루어진.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불과 물이다. 영화 속 불은 단순히 보면 '사건의 시작' 정도에 불과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위태함의 표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물은 구원자로서 소화(消火)한다. 영화 중반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는데, 죽은 고양이 사체를 태우다 그 위에 물을 끼얹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상징의 연장선에서, 미나토(湊, 항구를 의미)와 호시카와(星川, 별로 이루어진 냇물을 의미)는 서로에게 구원일 테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 하더라도, 비가 그친 초록을 함께 질주할 수 있는 서로의 구원자.
컷 하나하나의 아름다움도 두말할 것 없었다. 영화를 본 지 나흘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선연한 이미지가 몇 있다. 그중 가장 압권인 것은 영화 말미, 두 어른이 기차의 창문 위에 얹힌 흙을 쓸어내는 장면. 쓸어도 쓸어도 밀려들어오는 흙과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마치 검은 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그 상황적 긴박함과 시각적 아름다움의 역설적 조화가 주는 인상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나토나 요리의 시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이.
단출하지만 내러티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음악은 화룡점정이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 그 자체는 사실 그렇게까지 긴장감 넘치지 않는다. 어떤 작가, 어떤 감독이었다면 따듯한 휴먼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결국 위에서부터 언급했듯 치밀한 작법과 연출이 이 이야기에 서스펜스를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핵심이 된 것이 음악 연출이다. 시간을 채우지 않되, 음 하나하나에 긴장을 담아 숨을 죽이게 만드는 음악. 만약 관현악단의 금관 소리와 줄 켜는 소리가 이 영화를 가득 채웠으면, 플롯의 위대함이 꺾이는 것은 물론 애당초 이만큼의 긴장감이 부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 감독이라는 사실을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몰랐는데, 다시금 왜 그가 훌륭한 음악가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보여준 발군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게 그들 인생 최고의 연기가 아니길, 앞으로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길 바란다.
영화를 메시지라고 단언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각자가 읽어내는 메시지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의 그것과는 다를, 내가 <괴물>에서 발견한 메시지를 적음으로써 이 글을 매조짓고자 한다. 영화 속 어른들은 뒤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 사오리는 후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교장 선생님도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뒤에서 말을 거는 누군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뒤를 돌아본다. 뒤에 두고 온 것을 위해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상징체계 속, 피상의 상징인 어른이 아이가 상징하는 진실에 가닿는 순간은 과거의 것을 뒤집어 볼 때이다. 즉 돌아보고 뒤집어보는 것이 진실을 얻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피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마치 동굴의 죄수처럼, 동굴 안쪽에 비친 그림자를 열심히 보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림자가 아닌 진짜 세상을 보고 싶다면 고개를 돌려야 한다. 바라보던 대로 바라보는 것을 멈춘 뒤, 뒤를 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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