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상대방의 무지몽매함에 웃음으로 맞받아칠 수 있는 사람,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 온화하며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 필요하면 적과 맞서되 가능한 한 적을 피하는 사람,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최근에는 그 감도와 정도 모두 비교적 낮아졌지만, 어렸을 적부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쉽게 분노하고는 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복수를 원하거나 행했다.
중학생 시절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혈기 왕성한 사춘기 남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는 데에 실패하신 도덕 선생님은 수업을 안 하겠다 선언하시고는 소위 '깜지'를 시키셨다. 당신은 우리를 가르칠 생각이 없으니, 오늘 배워야 하는 범위를 베껴 쓰며 스스로 배우라고 하셨다. 그러려니 했다.
다음 차시도 똑같았다. 교실에 들어와 깜지를 시키고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교무실에 계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도덕 선생님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고, 나는 이 일을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릴 건데, 담임 선생님께 고지는 하고 교장 선생님을 뵙는 게 순서에 맞는 것 같아 잠시 들렸다'고 말씀드렸다. 담임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하며 자기와 해결하자고 하셨고, 다음 차시부터는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
지금껏 대개 그랬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적이 되어 싸우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누구든 그가 나를 해할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의 잘못에 부끄러움을 느끼게끔 하고 싶기도 했다.
최근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에 대해 깊게 고찰해 보진 않았다. 어느 날은 흘려보내고 어느 날은 머물렀다. 그러다 어제 정말 무례한 면접관을 만나 강렬한 분노를 느낀 것을 계기로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됐다.
이 삶에서 내가 정말 바라는 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결국 좋은 아빠, 좋은 남편. 그의 모양과 속성은 지금 예단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순간마다 바뀌어 가겠지만, 어쨌든 성숙함이라는 필요조건을 가질 것 같다.
성숙한 사람은 어떨까? 이 역시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늘 여유와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사람, 점이 아니라 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려진다.
그런 사람은 분노에 잠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가 나를 해"하도록 두는 것이니까. 의연하게 대응할 것이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거나, '그러라고 해'라고 생각하며. <명상록>의 가르침대로, 누구도 또 무엇도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을 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복수를 원할 수도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괜히 엮이지 않고 혼자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굳이 적을 만들고 그 적을 계몽시킬 필요가 없다. 가만히 두면 그는 더 못난 사람이 된다. 나는 성장하고 그는 퇴보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복수 아니겠는가.
<Englishman in New York>의 구절들을 떠올린다. 상대방의 무지몽매함에 웃음으로 맞받아칠 수 있는 사람,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 온화하며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 필요하면 적과 맞서되 가능한 한 적을 피하는 사람,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자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