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방황에서 배운 것들

자기 이해를 위한 방황을 긍정할 것, 이를 통해 깨달은 자신의 강점을 제련하고 활용할 것, 그 일련의 여정 동안 나를 보호해 줄 생태계를 찾을 것

2년의 방황에서 배운 것들
Photo credit: Damien Paeng

2년 전 이맘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찾고 싶다"며 센드버드를 떠났다. 방황하겠노라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지난 1월 말 센드버드에 돌아왔다.

그 2년의 세월을 방황이라 칭하기엔 머물던 곳들, 보살펴 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구태여 방황을 시작했던 내가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그 시간을 방황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칭하기도 겸연쩍은 게 사실이다.

의도한 방황은 나에 대한 이해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건네주었다. 그것들, 곧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아는 것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한 번의 방황을 마무리하며 "왜 방황했던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딱 맞아떨어지는 답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결국 나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방황이 불가피하다"는 어렴풋한 가설만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라는 문장에 대한 전영애 교수의 번역이다. 'Streben'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마음속의 솟구침'이라는 의미에 주목했다고 한다.

가만 보면 이 문장은 이상하다. 그토록 맹렬히 용솟음치는 지향이 있다면 곧장 그리 향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 조금 더 가만히 들여보고 있자면 그 함의를 알게 된다.

우리가 진정 간절히 바랄 만한 건 우리를 방황케 할 만한 것들뿐이라는 걸. 돌고 돌아야 이를 수 있는 곳만이 비로소 진정한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존주의자인 나로서는 '자기 이해'야말로 바로 그 지고의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의 실존은 줄달음치며 나로부터 도망친다. 나는 평생을 나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 동반자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매분 매초 부단히 변해 나가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나의 지향이 그것인 한 앞으로도 방황의 시간은 나를 찾아올 것이다. 잠깐이라도 그를 따라잡는 어느 순간에 이르기 위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지난하게 그를 좇게 될 터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을 믿고 기꺼운 마음으로 방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2. 나는 단일한 목표의 달성보다 총체적 시스템의 유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번 방황에서 나는 어떤 나와 화해했는가?

돌이켜 보면 지난 2년뿐 아니라 20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한 질문이 "나는 왜 이럴까?"였다. 참 많이도 물었고, 답을 찾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목표와 집중, 헌신에 대해서 비슷한 질문을 던져댔다. 나는 왜 하나의 목표에 미쳐 버리지 못할까? 나는 왜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할까? 나는 맹목에 가깝게 헌신하는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 걸까?

마음속에 그래야 한다, 그러고 싶다는 어떤 당위와 희망이 있었다. 주위에 소위 "미쳐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순수한 질문은 내게 다그침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언젠가 미국에서 도전해 보고 싶다고 공언하면 "그렇게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가서 뭐라도 해 보면 안 되느냐?" "미국에 가는 걸 그렇게 원한다면 다른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따위의 질문이 던져졌다. 아무리 나를 위한다 해도 내게는 위협처럼 다가왔던 질문들.

이제 나는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밉지도 않다. 더는 그런 당위와 희망을 들고 있지도 않다.

미국의 예를 계속 들어보자면,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에 가서 도전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성공해 내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가 생길 것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애당초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미국에 가고 싶다는 건 나를 지탱하는 시스템과 그 위에 사는 나를 미국에 옮겨 놓고 싶다는 의미다. 다른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일단 미국 땅에 발붙이고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결국 나는 내가 하나의 목표를 맹목적으로 좇기보다는 어떤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나와 화해하게 됐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질문을 공격적이지 않게, 실제로 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던질 수 있게 된 건 덤이다.

3. 농구 선수는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는 게 제일 좋다.

그런 관점에서, 자신의 강점을 알고 그 강점이 극대화되는 곳에서 이를 최대로 살리는 것이 좋다는 걸 새삼 느꼈다.

농구 선수가 야구장에 찾아가 농구를 하는 건 이상하다. 농구 선수가 야구장에서 야구를 하는 것도. 농구 선수가 농구장에서 야구를 하는 건 더욱 어지럽다. 농구선수는 농구장에서 농구를 할 때 가장 파괴적이다.

세상의 요구에 휩쓸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묻는 것에 소홀해지고는 한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발전에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려되어 있을까. 나도 나를 알기 위해 방황을 해야 하는데, 세상이 어떻게 나를 알고 나에게 맞는 길을 밝혀 주겠는가.

나도 나를 모른다는 건 달콤하면서도 잔혹한 사실이다. 내가 빛나야 하고 빛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나만이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발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오직 고독한 사유뿐일지도 모른다.

4. Ecosystem wins.

몇 페이지의 글로 정리될 수 있는, 한 시간이면 누군가 내게 일러줄 수도 있었던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직접 겪지 않았다면 알아도 믿지 않았을 것이기에 후회는 없다.

만약 그 사이에 처참하고 처절한 실패를 겪었다면 "후회는 없다"고 쉬이 말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크고 작은 도전들에 앞서 그런 실패들을 두려워했었다.

그때 힘이 되어 주었던 게 나를 둘러싼 생태계다. 작년 5월, 초기 창업팀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은사님이 '생태계'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나의 기업을 보지 말고 생태계를 보라고.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생태계가 하방을 어느 정도 막아줄 거라고.

그것을 무엇으로 정의하든 간에 소위 '성공'을 위해서는 대개 충분한 시행 횟수가 필요하다. 우리 인간은 확률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법칙에 따르면 그렇다.

충분한 시행 횟수는 충분히 긴 시간 동안의 생존을 요구한다. 그리고 충분히 긴 시간 동안의 생존은 뒷받침하는, 실패의 여파를 분산해 줄 생태계를 요구한다.

물론 우주의 법칙은 극단적인 사건들의 발생을 허한다. 따라서 짧은 시간 안에 큰 성공을 거두거나 생태계의 도움 없이 오랜 시간 생존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상치는 이상치일 뿐이다. 웬만해서는 나의 추락을 막아줄 어떤 하나의 계(系)가 필요하다.

동어반복이지만, 좋은 생태계일수록 좋다. 좋은 생태계는 단위 시간당 시행 횟수를 늘려주고, 개별 시행의 성공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여줄 것이다. 어쩌면 반대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생태계가 좋은 생태계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타인이 나를 찾아줄 수는 없지만, 나를 찾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를 둘러싼 생태계가 나를 성공으로 이끈다.


결국 2년의 방황에서 배운 것들은 "자기 이해를 위한 방황을 긍정할 것, 이를 통해 깨달은 자신의 강점을 제련하고 활용할 것, 그 일련의 여정 동안 나를 보호해 줄 생태계를 찾을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난 2년간 나를 지키고 응원해 준 모든 이에게 심심한 고마움을 전하며 글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