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라이프

루틴이야말로 백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백수 라이프
By GFDL permission obtained by Quadell. - http://www.samsays.com/,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45314

1. 기상 및 운동

8시쯤 일어난다. 5분 정도 동안 핸드폰을 보며 정신을 차린 뒤에 바로 뛰러 나간다. 한강변까지 나가는 데 8분 정도 걸리는데, 노래를 들으며 슬슬 뛰어간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가로지르다 보면 나 혼자 자본주의를 역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강변에 다다르면 공사장에서 흘러나오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마스크를 챙기는 걸 매번 깜빡한다. 숨을 잠깐 참으며 냄새를 뚫고 시작 지점에 다다른다. 몇 번의 근육통 이후로는 몸을 푸는 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러닝에 맞는 노래를 틀고 뛰기 시작한다. Linkin Park의 <What I've Done>과 같은 영화 OST를 틀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거대한 재앙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30초 뛰고 1분 쉬었는데, 이제는 1분 뛰고 1분 30초 쉰다. 다음 주부터는 3분 뛰고 1분 30초 쉬는 걸 네 번 반복하려 한다.

추워도 뛰고, 비가 와도 뛰고, 아파도 뛴다. 도저히 안 되겠을 때 아니면 일단 나간다. 나가고 나서부터는 몸이 나를 밀어준다. 백수가 된 이후 내게 생긴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해야만 한다는 믿음의 내재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2. 사이드 프로젝트

씻고 나면 9시쯤 된다. 9시 15분부터 10시까지 회의를 한다. 5~6년 만에 합을 맞추는 팀인데, 퍽 즐겁다. 특히 나의 역할은 실무 없는 디스커션 파트너라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럽다.​

백수의 위기는 다름이 아닌 가치 증명의 위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내게 남은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적당한 양의 일을 하는 것은 이러한 가치 증명의 위기에서 어느 정도 나를 자유롭게 한다.


3. 피아노 레슨 또는 연습

회의를 매일 하는 건 아닌데, 회의 여부와는 별개로 10시 즈음부터 피아노를 연습한다. 집에서 3분 거리에 피아노 학원이 있어서 연습하기 아주 수월하다. 늘 적당히만 하고 와야지 생각하는데, 하다보면 1시간이 넘어가고는 한다. 아무래도 한 곡에 3분 정도 되고, 마음에 들 때까지 치다 보면 20~30분은 금세 지나기 때문인 것 같다. 주에 한 번은 레슨을 받는다. 30분 레슨 4회에 15만 원이라고 생각하면 비싼데,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한 달 대관하는 데에 15만 원이고, 레슨 4회가 무료라고 생각하면 또 싸다. 연습을 많이 하니 충분히 낼 만한 가격이다. 슈만의 <Träumerei>를 마치고, 지금은 드뷔시의 <Clair de Lune>을 연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부터 꼭 치고 싶던 <Engagement Party>와 <I Giorni>를 연습하고 있다. 그리고 5월에 맞춰 <Im wunderschönen Monat Mai>도 연습 중이다.

일을 시작하고서는 도야의 가치를 잊었었다. 일은 그냥 하면 된다. 내가 해낼 수 없는 일도 없었을뿐더러, 무리다 싶으면 매니저와 얘기해 업무를 조절하면 된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선 나는 혼자다. 선생님이 운지법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알려주시지만, 많게는 동시에 열 개에 이르는 음표를 쳐내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다. 피아노는 정직하다. 요즘 말로 하면 "차갑다." 내가 건반을 세게 누르면 세게 소리 나고, 약하게 누르면 약하게 소리 난다. 페달을 잘 밟으면 부드럽게 이어지고, 잘 못 밟으면 코드가 섞여 버린다. 연습, 훈련, 인내의 가치. 그렇게 얻어낸 성취. 그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4. 점심 식사

점심은 반드시 식단을 하려고 노력한다. 보통 돼지고기 앞다리살 구이 또는 수육, BLTE 샌드위치, 서브웨이 샌드위치, 닭 가슴살 중에서 결정된다. 요즘은 BLTE 샌드위치를 많이 먹는다. 30% 할인이 일주일 뒤면 끝나기 때문에.... 아마 할인이 끝나면 서브웨이를 많이 가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장 통제하기 어려워하는 두 가지가 식욕과 운동하기 싫은 마음인데, 정오가 되기 전에 이 두 가지를 모두 통제해 내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차피 저녁은 자유식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


5. 책 읽거나 글쓰기

식사를 마치고 집안일을 하고 좀 쉬다 보면 1~2시쯤 된다. 이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때로는 카페나 한강 공원에 나가서 그렇게 한다. 책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할 테지만, 퇴사한 지 2개월 만에 9권의 책을 읽었으니 독서 성과가 꽤 있다고 봐도 될 것 같긴 하다. 인상적인 내용들, 내 자신에게 남기고 싶은 것들을 적거나 밑줄 치며 읽는 습관을 들였는데, 확실히 전보다 책의 내용이 더 잘 나의 것이 되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는 보통 읽은 책에 관해, 요즘 듣는 노래에 관해 쓴다. 사실 이 글도 <왜 칸트인가>라는 책을 정리하다가 딴짓하고 싶어서 쓰는 중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부분까지 썼는데 벌써 10,000자 정도의 분량이다. 학부 때도 이렇게 열심히 안 썼던 것 같은데.... <판단력비판>은 어떻게 쓰나. 한편 여행과 철학에 관한 책도 집필하고 있다. 근데 벌써 2주째 진도가 안 나가고 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을 타당한 논리로 엮어 새로운 내용으로 내놓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다. 결국 책의 결론은 삶에 대한 예찬이 될 텐데, 따라서 출판을 못 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꼭 다 쓰고 싶다. 삶을 예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를 낳을 자격을 갖는 것 아닐까.

​20살 이후로는 늘 쓰는 게 읽는 것보다 좋았는데, 요즘은 읽는 게 더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게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고민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작가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쓴다는 의미를 믿는 것이다. 책을 쓰는 건 나무위키에 익명으로 글을 적는 것, 유튜브에 올리는 영상을 만드는 것과는 좀 다르다. 물론 그런 곳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종착지가 대개 책 집필인 걸 보면, 지성에 있어 책은 별개의 지위를 가진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5. 저녁 식사

약속이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평균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약속이 있는 것 같다. 점심은 식단을 했으니, 저녁은 먹고 싶은 걸 먹는다. 양이 줄어 많이 들어가진 않지만, 또 잘 들어가는 날엔 열심히 먹는다.

​맛있는 걸 먹으며 가치 있는 대화를 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내게 삶은 그럴 수 있는 환경과 사람을 찾는 여정인 것 같기도 하다.


6. 여가

저녁 약속이 있으면 취침 시간에 거의 맞춰 돌아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냥 논다. 뭐하고 노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시간이 훌쩍 가곤 한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가서 걸을 때도 있고, 유튜브를 보거나 영화, 드라마를 볼 때도 있다. 요즘엔 핸드폰으로 홀덤을 한다.

​많은 것들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선택을 내리고, 선택된 분기를 살아가는 건 자신의 몫이다. 타인의 시선, 도발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장기적 시선을 견지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한계적 선택을 하는 것. 그것만이 본질이다.


7. 취침

11시쯤 자러 들어간다. 침실에 들어갈 때는 이북 리더기만 들고 들어간다. 책을 읽다 잠든다. 하릴없이 유튜브만 보다가 자던 옛날과 수면의 질, 삶의 만족도가 다르다. 이북 리더기는 벌써 제값을 다했다.


글의 길이처럼, 밤이 될수록 시간이 더 금방 간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을 때도 있다. 가끔은 내가 지난 두 달간 이뤄낸 게 뭘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서 출발해 이 글이 적힌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건강한 습관들을 세웠고, 몸을 만들어나가고 있고, 피아노를 다시 퍽 잘 치게 됐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릇된 인과를 상정하지 않고 바르게 보는 것. 그럼으로써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 그것만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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