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서 배운 것들
퇴사 두 달 반을 맞아 정리해 본, 그간 배운 것들.
1. 제약조건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든다.
삶을 괴롭게 만드는 건 우리에게 부과되는 제약조건이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일 때, 그런 현실은 대개 제약조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역시 제약조건이다. 제약조건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그 제약선과 접하는 최적의 지점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게 한다. 그것이 삶의 아름다움이다.
2. 어떤 미래는 닫히지 않은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닌 걸 아닌 대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끝장을 봐야 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다. 찝찝한 그대로 남겨두어야 하는 관계도 있는 법이다. 열린 채로 두어야 하는 기회도 역시 있다. 인생은 선형적인 이야기가 아니기에, 언젠가 되돌아올 수 있는 열린 결말의 챕터도 필요하다.
3.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할 수 있으면 모든 가능 세계가 합리화된다.
닿지 못한 가능 세계가 있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하곤 했다. 어떤 하나의 작은 선택, 심지어는 사소한 단어 선택이나 손끝의 움직임까지도 지금의 내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결여들이 마치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것만 같아 힘에 겹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관점에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어느 하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지 모르는 행복이다. 결국 나와 세계를 사랑하는 시작에는 지금 이 순간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있다. 다행히 지금 나는 퍽 행복하다.
4.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때 오히려 외로움이 커진다.
혼자서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수록 혼자서는 하지 못하는 것들의 존재감이 커진다. 아프리카까지 혼자 갈 수 있지만, 집 앞 괜찮은 식당에는 혼자 가지 못한다. 영화, 연극, 뮤지컬, 클래식, 전시를 혼자 보러 갈 수 있지만, TV 앞에 나란히 앉아 짧은 유튜브 한 편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함께라는 건 혼자인 것과 아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5.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학벌, 집안, 소득, 자산, 지위, 기품, 성적 매력 등을 다 떠나서, 또는 그것들을 종합해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존경이 부재하다고 존중이 부재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과 압력 앞에 존경 없는 존중은 위태로울 것만 같다. 물론 나 역시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6. 상대방의 취미와 취향이 무엇이냐보다는, 그것들이 static하냐 dynamic하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은 변한다. 8년 전 나의 가장 큰 취미는 노래방에 가는 거였다. 관악02를 타고 낙성대까지 내려가는 그 720원이 아까워 걸어서 30분씩 오가고는 했다. 이제는 걸어서 2분 거리에 노래방이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다. 독서는 가장 최근에 생긴 취미다. 작년에 내가 읽은 책이래봐야 5~6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주 최근까지도 인디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클래식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한다. 얼마나 변화에 열려있는가,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7. 웬만하면, 내 말이 맞을 수 있음을 고려하는 상대방과만 대화하는 편이 좋다.
똑똑하지만 함께 대화할 때면 숨이 턱턱 막히는 사람도 있다. 자기주장이 세지만 오히려 대화하다 보면 즐거운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상대방의 말이 맞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근거를 함께 증명하려 하느냐 아니냐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말이 도대체 맞으려면 어떤 근거가 필요한가? 그것은 객관적 사실인가, 가설인가, 개인적 경험인가? 그 믿음의 층위는 어느 정도인가, 바뀔 수 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근원 사실인가? 이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상대방과의 대화는 고역이다.
8. 운을 정규화하는 건 많은 시도와 일관된 전략이다.
재능이 있다기엔 오만할 수 있지만, 홀덤을 나쁘지 않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이런 선언은 홀덤에 실력이 존재하며, 운만이 승패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말도 안 되는 확률이 나를 괴롭힐 때도 있다. 사실 많은 것들이 그렇다. 따라서 끊임없이 시도하고, 베팅하고, 침착하게 전략을 실행해 나가며 운에 따른 변동폭을 줄여나가야 한다.
9. 10분을 깨어있는 하루의 1%로 생각하면 시간을 더 아끼게 된다.
하루하루가 금방 간다. 도대체 뭐 했는지 모르게 지나간 하루의 끝에는 후회가 뒤따른다. 행동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양적인 것을 비율로 바꾸는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시간들, 그중 특히 10분을 깨어있는 하루의 1%라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아니라 10분 10분이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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